2022년 5월 15일 일요일

자존감

진정한 자존감은

상대적이지 않다는걸 깨달았다.


어설픈 자존감은

대충 이렇다.


난 너를 좋아해.

근데 니가 나를 안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서 나도 널 안좋아할거야.

아니 널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을거야.

절대로 니가 먼저 좋아한다고 표현해줄때까지

난 내 마음을 보여주지 않을거야.

뭐 이런식이다.


진정한 자존감은

이렇다.


난 너를 좋아해.

니가 나를 좋아하건 말건

상관없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감정이

그런것엔 좌우되지 않아.

나는 너를 좋아하니

네가 좋다 말하고

그리고 그 다음을 위해 노력할거야.


자칫 높은 자존감이

스토커가 되라는 말처럼 들릴수도 있다.

스토커는 이미 사람과의 관계를 판단하는데

문제가 있는 사람이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어설픈 자존감은

묘함이 오가는 중에

내가 상처 받을 위치에 놓일 것이 두려워

온전히 나를 표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진정한 자존감은

그런것에 연연하지 않고

거절을 당하면 당하는대로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자존감은 수동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의 의사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을 얼마나 잘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존감이 낮은 사람과의 관계는

항상 불투명하고 피곤하다.

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의 관계는

언제나 선명하고 상쾌하다.


나는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맞는 걸까?






관리의 부재

조직이 융합하는데는

싸움이 필요하다.


본인도 알 수 없는

서로가 자신에게

허용되는 영역을 확인하기 위해선

치열하게 싸우고 내주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융합엔

서로가 싸울수는 있지만

헤어지는 관계는 아니라는

강력한 믿음이 전제된다.


그래야 찢어진 종이마냥

얼기설기 지저분하지만

무언가 꼭 맞는 접점으로 융합할 수 있게 된다.


현실은

칼을 쓴다.

많은 사람들의 융합은 불가능하고

시간소모가 많다는 이유로

포기한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만큼

더 많은 영역을 규제하고

부딪히지 않을 명목으로

서로를 만나지 못하도록 한다.


관리의 편리함을 위해

문제의 영역에 마진을 두고

모두가 그곳을 범하지 않도록

제한할 뿐이다.


문제는 생기지 않지만

서로는 알아볼 수 없고

긴밀히 가까워지지도 못한다.


문제는 항상 일어난다.

많은 영역은 제한된다.

구성원은 자유를 잃는다.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단순히 개인주의 같은 것이 아니다.

조직은 역사를 쌓으며

영역을 제한하고

아무도 만날수 없다.


구성원들에게 있어

회사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한 곳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회사가 자초한 일이다.

그것은 관리의 게으름으로 인한

결과물일 뿐이다.

존중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인정이 필요해.


내가 존중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다.

라는 인정.


그게 없이는 공허해.

참 별게 아닌데 그게 없으면

누구의 밑으로도

누구에게도 소속되려하지 않아.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것

그건 참 어려운 일이야.

정답도 없고

공허해.


그 마음

언제 떠날지 모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