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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6일 화요일

신장개업

원래는 그저 이직하는데 도움이나 될까 싶어 시작한 기술 블로그였는데

이직을 하고 여기저기 흘러다니다 보니 잘 안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와서 보니 예전 포스트들이 감춰져있었다.

어차피 썩어가는거 그냥 열어두자 싶어 다시 열어두었다.

썩어가는 와중에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나 보다.


블로그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고 누가 와서 볼지도 의문이지만

뭐 내 블로그 내가 맘대로 하는 건데 누가 뭐라 할까 싶어 다시 하기로 했다.


현재 직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논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그래도 내가 즐기며 했던 것이 논문 보며 정리하는 것이었으니

여기서라도 갈증을 풀어야겠다는 쪽으로 갇혀있던 의식에 물꼬를 텄다.


뭔가 감추는 것도 많고 숨기는 것도 많았는데

감추고 숨긴다고 뭐가 얼렁뚱땅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논문 정리도 하고

해보고 싶었던 컨셉 위주의 연구 아이템이나 여기서 한번 썰을 풀어봐야겠다.


예전 포스트는 보니 하루에 하나씩 논문을 정리한다고 했었는데

미친건가 싶다.

2주에 하나씩은 뭐라도 족적을 남겨보자.

연구자라는 놈이 그래도 트렌드는 따라가야지?

2023년 3월 30일 목요일

즐거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에서는 기쁨을 얻을 수 없다 했다.


나 도대체 얼마나 기쁘려고 유난히도 고난스러운걸까.


이제 좀 기뻐도 되지 않나 싶은 마음이다.

2023년 2월 13일 월요일

고대

그 복잡한 알고리즘으로도

여긴 찾을 수 없을게다.

인과가 없으니까.


여긴 발견해야 할 이유도

발견할 수 있을 키워드도 없다.


라벨은 내용과 관계없고

극히 사적일 뿐이다.

난지도 속에 깊숙히 파묻힌 버려진 캐리어 같은 공간


그 쓰레기 더미 안에서

의외로 깨끗한 캐리어를 발견하게 된다면

너는 기대를 하게 될까.

겁을 집어 먹게 될까.


왜 굳이 이런 걸 찾으려 했는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동기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나는 보이지 않지만

나는 볼 수 있는

은밀한 곳에서

세련되게 동기화 할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린다.


그 거추장스러움을

대수롭지 않게 보아주는

그런 사람이길 바란다.

2022년 12월 12일 월요일

궁금

언제쯤 이 블로그가 검색될까?

뭔가 많이 끄적거리긴 했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다.


딱히 음침하려고 노력하진 않지만

모든 것이 연결된 곳에서

아무것과도 연결되지 않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스스로 광고하는 건 재미가 없다.

어차피 관리도 하는둥 마는둥이니

쓰고 싶은걸 쓰고

그냥 흘러가자.


연연하지 않고 글을 쓰니

고고한 취미로 그만이다.


내가 알아주면 그만이다.

Typative

Talkative 했었다.

주고 받는 것에는

체력 소모가 심했다.

본질보다 주고 받음에 더 치중되었다.


나의 이야기를 위해서는

말은 의미없다.

나는 말보다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논쟁을 피하고 싶다.

모든 노력은 오래되면 그걸로 정답인 것이다.

내겐 공감이 필요할 뿐

더 맞는 것은 필요 없다.

휴가

그렇게 기대했다. 고대했다.

막상 도달하니 찰나의 흥분 뒤에 다시 무덤덤

이게 뭔가 싶었다.


종종 일상의 걱정이 불거진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무시했다. 노력해서.


빈도 수가 줄었다.

방해의 강도도 줄었다.

그러다 보니 멍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돌아왔다.

돌아오니 허무했다.

1주일이 지났지만 내게 남은 게 없었다.


문득

이렇게 허무해 본 게 얼마 만인지

새삼스러웠다.

잘 비워냈다 싶다.

뜬금

불쑥 무언가를 쓰고 싶었다.

예전엔 샘솟는 무언가가 줄줄 흘러 넘쳐 페이지를 검게 채웠으나

이제 탄력 잃은 실처럼 긴장감이

끊어져 버린다.


욕망 자체는 다행히 

손에 박혀 옷 섬유에 걸려 스칠 때마다 따끔거리는 가시처럼

날 자극하지만


페이지를 열면

무엇을 쓰려고 했었는지도 모를 만큼

사그라져 버린다.


구멍이 큰 관에 호흡을 불어넣는 것 마냥

후욱

헛힘이 빠진다.


쪼그라들어 간다.

2022년 9월 1일 목요일

무제

종종 뜬금없는 단어로 시작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든다.

주제는 의미 없으며
단순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로 시작해보고 싶음이다.
그저 시작해서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보고 싶음이다.

나에 대한 시험같은 것이라기 보단
충동적인 단어의 시작이 만들어내는 끝을 알아보고 싶어서이다.

나조차도 내가 어디로 갈지 예측할 수 없는 형태.

그 지긋지긋한 주제와 맥락 컨텍스트의 감옥
누가 가두지도 않은 곳에 갇혀
광우병 걸린 광우마냥 돌던 곳을 맴도는 지겨움

자연스러움은 나를 옭아매고
부자연스러움이 채찍질한다.

쓸 수 있는 단어는 한정적이다.
게다가 그 사전은 얇아진다.

조잡한 몇 개의 단어조차 문득 뿌옇다.
불쾌하고 서러운 감정은
토해내지도 내뱉지도 못한다.

섭취한 것이 없으니
앙상하다.

그 가지와 뼈대 기둥
한결같이
보잘것 없어
보여주기 부끄럽다.

내포 행간은 얼어죽을
어디서 들어먹은 명징 근처에도 못하다.

그 많던 유희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라는 관용구로
맥락없이 무언가 써보고 싶었던 취기는
기백없이 무너지고 두통만 남았다.

나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

무언가 섬세한 그것
아니
누군가가 세련되다고 말해줄 수 있을만한 그것
그런 것
그런 종류의 것
을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도 까마득하다.

2022년 8월 15일 월요일

부둣가였다.

노년의 낚시꾼이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본디 숫기 없는 나로서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쉽지 않았으나

그때는 왠지 모를 용기가 났었다.

그에게 여쭈었다.

"선생님, 미끼를 무엇을 쓰시는지요."

"아 이거요. 쓰테미유"

쓰테미란다.

낚시 용어중 일본어가 많다고 생각했던 관계로

그저 미끼 이름인 줄 알았다.

당시 낚시를 좋아한다고 외부에 공표는 하고 다녔으나

그럴듯한 식견이 쌓일만한 경험은 없었기에

그저 그런 미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럴듯한 낚시터에서 벗어나

잠에서 깼다.


네이버에서 쓰테미가 무엇인지 검색했다,

"すてみ: 목숨을 걺, 필사의 각오로 전력을 다함."


원하는 바가 있었으나, 박사과정을 밟아야 하는지에 대해

한없이 고민하던차에 꾸었던 꿈이었다.


난 나의 의지를 믿고

고민을 청산하고

다시 공부의 길로 들어섰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특별한 꿈이었다.


2022년 5월 15일 일요일

자존감

진정한 자존감은

상대적이지 않다는걸 깨달았다.


어설픈 자존감은

대충 이렇다.


난 너를 좋아해.

근데 니가 나를 안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서 나도 널 안좋아할거야.

아니 널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을거야.

절대로 니가 먼저 좋아한다고 표현해줄때까지

난 내 마음을 보여주지 않을거야.

뭐 이런식이다.


진정한 자존감은

이렇다.


난 너를 좋아해.

니가 나를 좋아하건 말건

상관없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감정이

그런것엔 좌우되지 않아.

나는 너를 좋아하니

네가 좋다 말하고

그리고 그 다음을 위해 노력할거야.


자칫 높은 자존감이

스토커가 되라는 말처럼 들릴수도 있다.

스토커는 이미 사람과의 관계를 판단하는데

문제가 있는 사람이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어설픈 자존감은

묘함이 오가는 중에

내가 상처 받을 위치에 놓일 것이 두려워

온전히 나를 표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진정한 자존감은

그런것에 연연하지 않고

거절을 당하면 당하는대로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자존감은 수동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의 의사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을 얼마나 잘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존감이 낮은 사람과의 관계는

항상 불투명하고 피곤하다.

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의 관계는

언제나 선명하고 상쾌하다.


나는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맞는 걸까?






관리의 부재

조직이 융합하는데는

싸움이 필요하다.


본인도 알 수 없는

서로가 자신에게

허용되는 영역을 확인하기 위해선

치열하게 싸우고 내주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융합엔

서로가 싸울수는 있지만

헤어지는 관계는 아니라는

강력한 믿음이 전제된다.


그래야 찢어진 종이마냥

얼기설기 지저분하지만

무언가 꼭 맞는 접점으로 융합할 수 있게 된다.


현실은

칼을 쓴다.

많은 사람들의 융합은 불가능하고

시간소모가 많다는 이유로

포기한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만큼

더 많은 영역을 규제하고

부딪히지 않을 명목으로

서로를 만나지 못하도록 한다.


관리의 편리함을 위해

문제의 영역에 마진을 두고

모두가 그곳을 범하지 않도록

제한할 뿐이다.


문제는 생기지 않지만

서로는 알아볼 수 없고

긴밀히 가까워지지도 못한다.


문제는 항상 일어난다.

많은 영역은 제한된다.

구성원은 자유를 잃는다.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단순히 개인주의 같은 것이 아니다.

조직은 역사를 쌓으며

영역을 제한하고

아무도 만날수 없다.


구성원들에게 있어

회사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한 곳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회사가 자초한 일이다.

그것은 관리의 게으름으로 인한

결과물일 뿐이다.

존중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인정이 필요해.


내가 존중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다.

라는 인정.


그게 없이는 공허해.

참 별게 아닌데 그게 없으면

누구의 밑으로도

누구에게도 소속되려하지 않아.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것

그건 참 어려운 일이야.

정답도 없고

공허해.


그 마음

언제 떠날지 모르거든.

2022년 3월 15일 화요일

여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온전히 생각할 시간이 인정받는 여유가 필요하다.


쉬는 시간이 아니다.

그저 온전한 공백

쉬는 시간을 넘어선

완전한 여유

그게 필요하다.


짬을 내는 것이 아니다.

일이 없어 보일만큼 온전한 공백만이

무언가를 그릴 수 있을만한

새하얀 도화지를 만들 수 있고

그제서야 우리는 새로운 걸을 그릴 수 있다.


왜 새로운 걸 생각하지 못했느냐 하지 마라.

정말 그에게 주어지는 시간을

온전히 믿고 있었는지

그 말을 꺼내기 전에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촉박하고

여유가 없고

쫓긴다.


쫓기는 사람에게 숨 고를 시간을 주는 것과

그저 한가로이 하늘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시간인 것이다.


쫓기는 사람은 결코

떨어지는 사과를 볼 수 없다.

2022년 2월 20일 일요일

관계

내가 누구에게 마음을 준다는 건
나의 감각을 상대에게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나의 감각은
그 사람의 눈과 입술 몸짓 옷매무새까지 스며들어
수 많은 인과를 해독하려 노력한다.

그와의 관계가 저물무렵
우리는 거둘 수 없음을 알게된다.

내어준 나의 일부는
회수할 수 없으면
단지 베어내야 함을 깨닫는다.

넘쳐나는 감정을
수없이 도려내면
우리에겐 남아있는 것이
얼마 없음을 알게된다.

도려내는 것은
머리를 깍는 정도가 아닌
작두에 올려진 손가락과 같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위협이 된다.

살기 위해
버티기 위해
벰 이후의 휘청임을 버틸 수 없기에
우리는 더 이상의 확장을 멈춘다.

건조해진다.
바짝 갈라진다.
딱딱해진다.

그 깊고 깊은 내면의
이주 작은
연약하고도
부드러우며
향기로운
그 마지막 속살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아직 남은 많은 감정을
말라 비틀어
단단한 껍질로
만들어 버티기로 결정한다.

무미 건조해지는 것은
차마 잃고 싶지 않은
내 삶의 마지막 
아주 작은 순수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한
저항인 것이다.




2020년 4월 1일 수요일

삶의 가치

모두에게 주어진 삶이다.
요구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삶은
꽤나 불공평하고 또한 대부분에게 고통스럽다.
단지 각자의 계획대로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저마다의 삶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고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고찰을 요구한다.
살겠다고 한적도 없는 삶은
가혹하게 지금의 자신보다는
한결 더 높은 가치관을 쟁취하도록 강요한다. 

누구에게나 절대적으로 옳은 삶은 없다.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내는 것
그것 자체만으로도
훌륭하고 감격스러우며 존경받아야 함이 마땅하다.

우리는
혐오와 비판으로 가득찬 사회에서
오만한 저울질을 잠시 멈추고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해야만 한다.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이가
절대적인 잣대에 주눅이 들어
스스로가 잠재적인 범죄자가 될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단지 누군가와 이야기 하는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끼고
송구스러워 해야할 것이 겁이나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되는 삶이
이상향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소한 우리들끼리의 전쟁을 멈추고
서로를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부터
내 삶의 무게를 줄여나가야만 한다. 

나의 삶은 고단하고
나와 같은 삶의 고단함은 꽤나 일반적이니
누군가를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괴롭힘의 대상으로 보지 말 것이며
더 많은 선량한 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많은 삶을 대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잣대와 저울질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해방시켜
그러한 존중으로부터
스스로에게 고통의 시간이 아닌
자랑스러움으로 가득찬 삶을 살도록 도와야만 한다. 

우리는 대부분
삶의 굴레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니
우리는 이러한 고통으로부터 말미암은
독기를 서로에게 방사하며
졸렬히 내가 더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는것 대신 

각자 자신만의 기준에서 조금 더 나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감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격려하며
이 무거운 삶에의 동질감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위안을 주고 받는
유대감으로부터 비롯한
안정을 추구한다면 

더이상
바라지 않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고통스러운 형벌로 치부되기보단 

우연치 않게 태어나
나만의 자아를 가지고
특별한 삶을 영위해 본 기회를 얻은 것에
감사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19년 10월 26일 토요일

착각

세상엔 아직도 그런 놈들이 있다.
별것도 아닌걸 손에 쥐고
아무것도 보여준적도 없으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들의 가능성인것 마냥
희희낙락하는 모습.

보통은 대부분 그런 맛으로 세상을 산다.
물론 나도 그렇다.

곧 깨닫게 된다.
의미없는 보상이 없고
한결같은 충성이 없고
만만한 희망이 없음을.

결국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음을
그리고
알량한 신선놀음은 단지 소꿉장난이었음을

왜 지금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랐겠지만
곧 깨닫게 된다.

그 많은 의미없음에는
내 자신이 밑바탕에 있었던 것임을
난 아직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던게 아니라
사실 그게 전부였음 또한 깨닫게 된다.

원래
아무것도 모를때가 제일 행복하다.

2019년 10월 23일 수요일

不惑

마흔을 불혹이라 한다.
사소한 일에 혹함이 없다는 뜻이나, 이전에는 온전히 깨닫지 못했다.

불혹은 단순히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 현혹됨이 없음을 뜻하기 보단,

이제껏 경험한 인과를 바탕으로,
대부분의 상황에 대한 결론이 예측가능하며,
이러한 예측을 통해 일련의 사태에 대한 감정의 요동을 막을 수 있는 노련함
정도를 의미하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감정의 동요가 소모하는 에너지는 결코 작지 않으니,
보통은 기대하지 않고 낙관하지 않음으로서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막고자 노력한다.
감정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둔감해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시선으로 볼 때, 이는 마치 서서히 감정을 잃어가는 것과 진배없어 보인다.

하지만 노화에 따른 에너지의 감소는 필연적이며, 중년의 감정적인 진동은 감쇄시킬 에너지의 부족으로 인해 자칫 발산하게 될지도 모르니, 마냥 탓할수도 없다.
더 늙음을 대비하는 연습일 수도 있고...

문득, 불혹은 노화에 의해 줄어든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한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괜한 글을 끄적여 본다.

어느덧 나의 웃음도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 느껴지는 날이다.

문답

어린 제자가 물었다.
"배움의 끝은 어디입니까."

스승은 되물었다.
"왜 배움의 끝을 묻느냐."

제자는 다시 물었다.
"문득 끝없는 배움에의 갈망과 조급함이 고통스럽게 느껴져 그 끝이 궁금했습니다."

스승은 답했다.
"배움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성취의 차등이 고통을 주는 것이다."

제자는 쭈볏거리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어찌해야 하염없이 배울 수 있겠나이까."

스승도 마지막으로 답했다.
"무엇이 되겠다 근심하지 말고, 단지 정해진 것을 행하고 있다 생각하라. 상념은 장애가 되고 무리함은 해치게 마련이니, 모든 배움은 자신의 그릇만큼 담으면 그 뿐이다."

제자는 걸었고, 이내 생각에 잠겼다.

2019년 5월 29일 수요일

오늘부터

왠만하면 하루에 한편의 논문을 읽고
그에 대한 정리를 하고자 한다.
그 정도는 되어야 머리가 돌아가겠다.

많은 걸 보아야 하니
최대한 간단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정리하기

2019년 3월 26일 화요일

글쓰기의 어려움

좁디좁은 2평 남짓의 고시텔에 앉아 있다.
처음에는 몹시도 답답하여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허나 날이 갈수록 정겨워졌다.

아침에 샤워를 하고 나간 침대 옆 
샤워실 겸 화장실에서의 물곰팡내와
다 떨어진 방향제 병에서 꿋꿋이 풍겨 나오는 비릿한 향의 조화는
그렇게도 역겨웠지만 이제는 자못 달갑다.

그 갑갑함이 내겐 에너지였으나
이 달가움이 되레 휴식이 된다.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글을 끄적인다.

아무도 모르는 이 글은
아무도 모르게 도사리고 있다.

아무도 물지 못하며
그 누구의 심금에도 미치지 못할것이 뻔하다.

음흉거리며
어두운 골목에 몸을 숨기며
내 은밀한 부위를 드러낸 채
누가 봐주길 기대하는
이 글은 그런 바바리맨 같은 초라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