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26일 토요일

착각

세상엔 아직도 그런 놈들이 있다.
별것도 아닌걸 손에 쥐고
아무것도 보여준적도 없으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들의 가능성인것 마냥
희희낙락하는 모습.

보통은 대부분 그런 맛으로 세상을 산다.
물론 나도 그렇다.

곧 깨닫게 된다.
의미없는 보상이 없고
한결같은 충성이 없고
만만한 희망이 없음을.

결국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했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음을
그리고
알량한 신선놀음은 단지 소꿉장난이었음을

왜 지금 그렇게 되었는지는 몰랐겠지만
곧 깨닫게 된다.

그 많은 의미없음에는
내 자신이 밑바탕에 있었던 것임을
난 아직 제대로 보여준 적이 없었던게 아니라
사실 그게 전부였음 또한 깨닫게 된다.

원래
아무것도 모를때가 제일 행복하다.

2019년 10월 23일 수요일

不惑

마흔을 불혹이라 한다.
사소한 일에 혹함이 없다는 뜻이나, 이전에는 온전히 깨닫지 못했다.

불혹은 단순히 무언가 또는 누군가에 현혹됨이 없음을 뜻하기 보단,

이제껏 경험한 인과를 바탕으로,
대부분의 상황에 대한 결론이 예측가능하며,
이러한 예측을 통해 일련의 사태에 대한 감정의 요동을 막을 수 있는 노련함
정도를 의미하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감정의 동요가 소모하는 에너지는 결코 작지 않으니,
보통은 기대하지 않고 낙관하지 않음으로서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막고자 노력한다.
감정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둔감해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시선으로 볼 때, 이는 마치 서서히 감정을 잃어가는 것과 진배없어 보인다.

하지만 노화에 따른 에너지의 감소는 필연적이며, 중년의 감정적인 진동은 감쇄시킬 에너지의 부족으로 인해 자칫 발산하게 될지도 모르니, 마냥 탓할수도 없다.
더 늙음을 대비하는 연습일 수도 있고...

문득, 불혹은 노화에 의해 줄어든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한 자연의 섭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괜한 글을 끄적여 본다.

어느덧 나의 웃음도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 느껴지는 날이다.

문답

어린 제자가 물었다.
"배움의 끝은 어디입니까."

스승은 되물었다.
"왜 배움의 끝을 묻느냐."

제자는 다시 물었다.
"문득 끝없는 배움에의 갈망과 조급함이 고통스럽게 느껴져 그 끝이 궁금했습니다."

스승은 답했다.
"배움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성취의 차등이 고통을 주는 것이다."

제자는 쭈볏거리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어찌해야 하염없이 배울 수 있겠나이까."

스승도 마지막으로 답했다.
"무엇이 되겠다 근심하지 말고, 단지 정해진 것을 행하고 있다 생각하라. 상념은 장애가 되고 무리함은 해치게 마련이니, 모든 배움은 자신의 그릇만큼 담으면 그 뿐이다."

제자는 걸었고, 이내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