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12일 월요일

궁금

언제쯤 이 블로그가 검색될까?

뭔가 많이 끄적거리긴 했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다.


딱히 음침하려고 노력하진 않지만

모든 것이 연결된 곳에서

아무것과도 연결되지 않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스스로 광고하는 건 재미가 없다.

어차피 관리도 하는둥 마는둥이니

쓰고 싶은걸 쓰고

그냥 흘러가자.


연연하지 않고 글을 쓰니

고고한 취미로 그만이다.


내가 알아주면 그만이다.

Typative

Talkative 했었다.

주고 받는 것에는

체력 소모가 심했다.

본질보다 주고 받음에 더 치중되었다.


나의 이야기를 위해서는

말은 의미없다.

나는 말보다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논쟁을 피하고 싶다.

모든 노력은 오래되면 그걸로 정답인 것이다.

내겐 공감이 필요할 뿐

더 맞는 것은 필요 없다.

휴가

그렇게 기대했다. 고대했다.

막상 도달하니 찰나의 흥분 뒤에 다시 무덤덤

이게 뭔가 싶었다.


종종 일상의 걱정이 불거진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무시했다. 노력해서.


빈도 수가 줄었다.

방해의 강도도 줄었다.

그러다 보니 멍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돌아왔다.

돌아오니 허무했다.

1주일이 지났지만 내게 남은 게 없었다.


문득

이렇게 허무해 본 게 얼마 만인지

새삼스러웠다.

잘 비워냈다 싶다.

뜬금

불쑥 무언가를 쓰고 싶었다.

예전엔 샘솟는 무언가가 줄줄 흘러 넘쳐 페이지를 검게 채웠으나

이제 탄력 잃은 실처럼 긴장감이

끊어져 버린다.


욕망 자체는 다행히 

손에 박혀 옷 섬유에 걸려 스칠 때마다 따끔거리는 가시처럼

날 자극하지만


페이지를 열면

무엇을 쓰려고 했었는지도 모를 만큼

사그라져 버린다.


구멍이 큰 관에 호흡을 불어넣는 것 마냥

후욱

헛힘이 빠진다.


쪼그라들어 간다.

2022년 9월 1일 목요일

무제

종종 뜬금없는 단어로 시작된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든다.

주제는 의미 없으며
단순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로 시작해보고 싶음이다.
그저 시작해서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보고 싶음이다.

나에 대한 시험같은 것이라기 보단
충동적인 단어의 시작이 만들어내는 끝을 알아보고 싶어서이다.

나조차도 내가 어디로 갈지 예측할 수 없는 형태.

그 지긋지긋한 주제와 맥락 컨텍스트의 감옥
누가 가두지도 않은 곳에 갇혀
광우병 걸린 광우마냥 돌던 곳을 맴도는 지겨움

자연스러움은 나를 옭아매고
부자연스러움이 채찍질한다.

쓸 수 있는 단어는 한정적이다.
게다가 그 사전은 얇아진다.

조잡한 몇 개의 단어조차 문득 뿌옇다.
불쾌하고 서러운 감정은
토해내지도 내뱉지도 못한다.

섭취한 것이 없으니
앙상하다.

그 가지와 뼈대 기둥
한결같이
보잘것 없어
보여주기 부끄럽다.

내포 행간은 얼어죽을
어디서 들어먹은 명징 근처에도 못하다.

그 많던 유희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도 그럴 것이' 라는 관용구로
맥락없이 무언가 써보고 싶었던 취기는
기백없이 무너지고 두통만 남았다.

나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다.

무언가 섬세한 그것
아니
누군가가 세련되다고 말해줄 수 있을만한 그것
그런 것
그런 종류의 것
을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도 까마득하다.

2022년 8월 15일 월요일

부둣가였다.

노년의 낚시꾼이 낚시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본디 숫기 없는 나로서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기 쉽지 않았으나

그때는 왠지 모를 용기가 났었다.

그에게 여쭈었다.

"선생님, 미끼를 무엇을 쓰시는지요."

"아 이거요. 쓰테미유"

쓰테미란다.

낚시 용어중 일본어가 많다고 생각했던 관계로

그저 미끼 이름인 줄 알았다.

당시 낚시를 좋아한다고 외부에 공표는 하고 다녔으나

그럴듯한 식견이 쌓일만한 경험은 없었기에

그저 그런 미끼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럴듯한 낚시터에서 벗어나

잠에서 깼다.


네이버에서 쓰테미가 무엇인지 검색했다,

"すてみ: 목숨을 걺, 필사의 각오로 전력을 다함."


원하는 바가 있었으나, 박사과정을 밟아야 하는지에 대해

한없이 고민하던차에 꾸었던 꿈이었다.


난 나의 의지를 믿고

고민을 청산하고

다시 공부의 길로 들어섰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특별한 꿈이었다.


2022년 5월 15일 일요일

자존감

진정한 자존감은

상대적이지 않다는걸 깨달았다.


어설픈 자존감은

대충 이렇다.


난 너를 좋아해.

근데 니가 나를 안좋아하는 것 같아.

그래서 나도 널 안좋아할거야.

아니 널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을거야.

절대로 니가 먼저 좋아한다고 표현해줄때까지

난 내 마음을 보여주지 않을거야.

뭐 이런식이다.


진정한 자존감은

이렇다.


난 너를 좋아해.

니가 나를 좋아하건 말건

상관없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감정이

그런것엔 좌우되지 않아.

나는 너를 좋아하니

네가 좋다 말하고

그리고 그 다음을 위해 노력할거야.


자칫 높은 자존감이

스토커가 되라는 말처럼 들릴수도 있다.

스토커는 이미 사람과의 관계를 판단하는데

문제가 있는 사람이지.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어설픈 자존감은

묘함이 오가는 중에

내가 상처 받을 위치에 놓일 것이 두려워

온전히 나를 표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진정한 자존감은

그런것에 연연하지 않고

거절을 당하면 당하는대로

두려워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자존감은 수동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의 의사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을 얼마나 잘 표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존감이 낮은 사람과의 관계는

항상 불투명하고 피곤하다.

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의 관계는

언제나 선명하고 상쾌하다.


나는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맞는 걸까?






관리의 부재

조직이 융합하는데는

싸움이 필요하다.


본인도 알 수 없는

서로가 자신에게

허용되는 영역을 확인하기 위해선

치열하게 싸우고 내주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융합엔

서로가 싸울수는 있지만

헤어지는 관계는 아니라는

강력한 믿음이 전제된다.


그래야 찢어진 종이마냥

얼기설기 지저분하지만

무언가 꼭 맞는 접점으로 융합할 수 있게 된다.


현실은

칼을 쓴다.

많은 사람들의 융합은 불가능하고

시간소모가 많다는 이유로

포기한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만큼

더 많은 영역을 규제하고

부딪히지 않을 명목으로

서로를 만나지 못하도록 한다.


관리의 편리함을 위해

문제의 영역에 마진을 두고

모두가 그곳을 범하지 않도록

제한할 뿐이다.


문제는 생기지 않지만

서로는 알아볼 수 없고

긴밀히 가까워지지도 못한다.


문제는 항상 일어난다.

많은 영역은 제한된다.

구성원은 자유를 잃는다.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단순히 개인주의 같은 것이 아니다.

조직은 역사를 쌓으며

영역을 제한하고

아무도 만날수 없다.


구성원들에게 있어

회사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한 곳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회사가 자초한 일이다.

그것은 관리의 게으름으로 인한

결과물일 뿐이다.

존중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인정이 필요해.


내가 존중할 수 있을만한 사람이다.

라는 인정.


그게 없이는 공허해.

참 별게 아닌데 그게 없으면

누구의 밑으로도

누구에게도 소속되려하지 않아.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것

그건 참 어려운 일이야.

정답도 없고

공허해.


그 마음

언제 떠날지 모르거든.

2022년 3월 15일 화요일

여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온전히 생각할 시간이 인정받는 여유가 필요하다.


쉬는 시간이 아니다.

그저 온전한 공백

쉬는 시간을 넘어선

완전한 여유

그게 필요하다.


짬을 내는 것이 아니다.

일이 없어 보일만큼 온전한 공백만이

무언가를 그릴 수 있을만한

새하얀 도화지를 만들 수 있고

그제서야 우리는 새로운 걸을 그릴 수 있다.


왜 새로운 걸 생각하지 못했느냐 하지 마라.

정말 그에게 주어지는 시간을

온전히 믿고 있었는지

그 말을 꺼내기 전에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너무 촉박하고

여유가 없고

쫓긴다.


쫓기는 사람에게 숨 고를 시간을 주는 것과

그저 한가로이 하늘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시간인 것이다.


쫓기는 사람은 결코

떨어지는 사과를 볼 수 없다.

2022년 2월 20일 일요일

관계

내가 누구에게 마음을 준다는 건
나의 감각을 상대에게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나의 감각은
그 사람의 눈과 입술 몸짓 옷매무새까지 스며들어
수 많은 인과를 해독하려 노력한다.

그와의 관계가 저물무렵
우리는 거둘 수 없음을 알게된다.

내어준 나의 일부는
회수할 수 없으면
단지 베어내야 함을 깨닫는다.

넘쳐나는 감정을
수없이 도려내면
우리에겐 남아있는 것이
얼마 없음을 알게된다.

도려내는 것은
머리를 깍는 정도가 아닌
작두에 올려진 손가락과 같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위협이 된다.

살기 위해
버티기 위해
벰 이후의 휘청임을 버틸 수 없기에
우리는 더 이상의 확장을 멈춘다.

건조해진다.
바짝 갈라진다.
딱딱해진다.

그 깊고 깊은 내면의
이주 작은
연약하고도
부드러우며
향기로운
그 마지막 속살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아직 남은 많은 감정을
말라 비틀어
단단한 껍질로
만들어 버티기로 결정한다.

무미 건조해지는 것은
차마 잃고 싶지 않은
내 삶의 마지막 
아주 작은 순수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한
저항인 것이다.




2022년 2월 18일 금요일

경화

차라리 그런

단단함이나 묵직함이었으면 좋으련만


그저 딱딱함에 불과하다.

유연하여 뭐든 될 수 있을것 같음은

잊은지 오래다.


색도 바랜듯 하고

단단하여 갈라진 류의 것들이 그러하듯

생동감이 없다.


부드러워 조물락 거리고픈

앙증맞음보단

뭐하나 해될것 없이

그냥 있는데도

차마 손대기 싫은 느낌의 것이

되고 있다.


그렇게 촉촉하거나

물렁한 무언가

그 무언가가 자신없다.


그낭

나는 푸석해진채로

더 푸석해짐을

피할수도 없이

맡긴채 퇴화한다.

2022년 1월 2일 일요일

그리하여

나아가는데

자유로워야 하며

시선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

아울러 스스로 업신여기지 말 것이며

쌓은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능히 이뤄왔으니

스스로를 존경하며 따르고 의심치 말고

담대히 세상을 대하여

현실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나의 말은 더이상 가볍지 않으니

그저 의견을 구하기보단

스스로 길이 되어야 한다.


한마디 한마디를 커다란 기둥을 뿌리내리듯

확신을 두고

의심치 말며

나아가면

그 뿐이다.


나의 것은

미묘하게 엇나갈 순 있으나

결코 틀리지 않는다.


그러니 나아가면

어느덧 도달하거나

가깝게 됨은 필연적이니

먼저 스스로를 믿어 의심치 않는

담대함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또 어떠하랴.

그저 한번 뿐이니

군림할 기세로

뻗어나가면

닿을 것이다.


이젠

하나의 큰 걸음을 내딛어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하나의

길이 되어야만 한다.